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Mostafa Malaekah

번역: 후세인 크르데미리

교정 : 카람 김은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지은이  무쓰타파 말라이카 (Mostafa Malaekah)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리석은 사람은 ‘먹기 위해서’ 살고, 지혜로운 사람은 ‘살기 위해서’ 먹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 지혜로운 사람은 무슨 목적을 위해 사는가? 삶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으며, 사람은 살아가야 하는 목적이 있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무지는 그 경중을 떠나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의 이유나 삶의 목표, 그리고 죽은 뒤 자신의 뒤에 남게 될 결과를 모른다면 그러한 무지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사색가들은 이러한 의문들을 간단한 말로 표현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왜?” 다시 말하자면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물질적인 세계만 믿고 창조주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無神論者)들은 오로지 지각에 의한 자료만을 신뢰한다. 그들에 따르면 우주는 스스로 생겨났다고 한다. 우주의 모든 질서는 단순한 우연의 결과에 불과하며, 사람은 여느 동물 또는 식물과 다를 바 없고, 잠시 동안 이 세상에 머물다가 삶을 끝마치는 존재라는 것이다.

창조주가 존재하며 그분이 인간을 인도하기 위해 예언자들을 우리에게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혼란은 무신론자들과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들의 마음의 평온과 안정을 빼앗아 자못 고통을 줄 것이다. 불신자(不信者)들은 자신의 존재의 목적에 대해 진실한 답변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살며, 이 삶의 쾌락을 위해 산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삶이 재미없어지고 그들 자신이 엄청난 고난을 겪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때에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들, 그리고 삶의 목적을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수가 자살(自殺)을 감행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본의 경우를 보자. WHO(세계보건기구) 발표에 따르면 2006년 일본에서는 총 29,921건의 자살이 발생했다. 하루 82건씩 발생하며, 한 시간에 3명 꼴이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국민들이 의식주(衣食住)와 의료보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본임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만약 모래 속에서 시계를 발견했다면?

  무슬림은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들에게 말한다. 당신이 사막 한가운데서 시계를 발견했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어떤 사람이 이 시계를 떨어뜨렸다고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그 시계가 저절로 온 것으로 추정할 것인가? 물론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시계가 모래 속에서 스스로 존재하며 스스로 그 모습을 나타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땅속에 묻힌 금속들이 시계 부품들로 만들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계는 반드시 제작자가 있게 마련이고, 만약 그것이 정확한 시간을 표시한다면 우리는 그 시계를 만든 이가 지능적인 사람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단순한 우연으로는 제대로 작동하는 시계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것은 또 어떤 것이 있을까?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생각해 보자. 그 시간이 너무나도 정확하여 전문가들이 먼 앞날까지의 일출과 일몰을 알고 신문에 쓰고 있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 시간들을 관리하는가? 만약 지능적인 제작자 없이 시계가 작동할 수 없다면, 태양은 어찌하여 시계처럼 규칙적으로 뜨고 지기를 반복하는 것일까? 이는 스스로 이루어지는 일인가?

  지구로부터 약 149,600,000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태양은 지구와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혜택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생각해 보자. 만약 태양이 좀 더 가까이 다가오면 지구는 불타오르게 된다. 또한 태양이 너무 멀리 떨어지면 지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얼음 행성으로 변하게 된다. 지금 이 거리가 적당하다고 누가 미리 결정했을까? 그저 우연히 그렇게 되었을까? 태양이 없으면 식물은 자라지 못하고, 동물과 사람은 그 결과로 굶어 죽게 된다. 태양이 우리를 위해 거기에 있기로 그렇게 스스로 결정했을까?

  태양 빛은, 지구 대기(大氣) 속의 오존층이 막아주지 않으면 우리에게 매우 위험한 빛이 된다. 그러나 지구를 둘러싼 대기가 있어 그것이 해로운 자외선(紫外線)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누가 이러한 보호막을 우리 주위에 설치하였는가?

  일출을 보자. 우리는 태양의 에너지와 한낮을 밝혀주는 태양빛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또한 일몰이 필요하다. 뜨거운 열이 지속되어서는 안되며 시원한 밤이 있어야 하며 수면을 취할 수 있도록 빛은 꺼져야 한다.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누가 이러한 작용들을 조절하는가?

  태양의 온기와 적절한 기후를 갖추었지만 우리는 거기에 무언가를 추가하고 싶다. 아름다움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마치 옷을 통해 따뜻함을 얻고 피부를 보호할 수 있게 되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보기 좋은 옷을 원하는 것과 같다. 인간이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태양의 출몰을 고안하는 그분은 단순하지만 깜짝 놀랄만한 장관을 연출해낸다.

 우리는 우리에게 빛과 에너지, 보호와 아름다움을 선사해주신 조물주께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들이 사막 한가운데서 정확한 시간과 아름다운 모양의 시계를 발견했다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시계를 만든 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아름다움의 진가를 알고 세련된 지능을 갖춘 시계 제작자의 존재를 부인할 수 있을까? 그분이 바로 우리를 만든 하나님인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신(神)을 믿는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인간이 신(神)을 믿고 경배해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인류학이나 역사학 전문가들의 견해는 일치한다. 그러기에 한 유명한 역사학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역사를 살펴보면 궁전, 공장 또는 요새가 없는 도시들은 있지만 예배 장소가 없는 도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먼 옛날부터 인간들은 단순히 이 세상의 짧은 삶을 위해 자신이 창조되었을 것이라 믿지 않았으며,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다른 장소로 갈 것이라 생각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을 살펴보자. 그들은 시신을 미라화(化)한 뒤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어 무덤 속에 죽은 이의 소유였던 보물과 먹고 마실 것을 놓아두었다. 초기의 역사기록들을 보면 (극소수의 예를 제외하고) 인류는 창조주의 존재와 죽음 뒤의 삶이 있음을 모두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창조주의 본질에 대해서는 서로의 의견이 다르며, 예배의 방법이나 사후세계의 묘사도 각각 달랐다. 예를 들어 힌두교는 환생(還生)을 믿으며, 사람이 죽은 뒤 그 선악(善惡)의 업보에 따라 영혼이 다른 사람이나 동물의 몸에 들어가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과정은 한없이 반복되어 마침내 그 영혼이 완벽의 경지에 올라 창조주와 일치될 때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도 역시 죽은 뒤의 삶을 믿지만 힌두교의 윤회(輪廻)와는 다르다. 이 세 종교 모두, 사람이 죽은 뒤 그 영혼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각각 다른 관점을 갖는다.

역사를 통해 모든 민족과 사회가 창조주의 존재를 믿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는, 시대를 초월한 예언자들의 사명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그만두고 유일신이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을 외면하였나?

  오늘날의 세계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창조주와 사후 세계를 믿지 않고 있다. 체코공화국에서 2000년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단지 13%가 사후세계를, 그리고 17%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된 주요한 원인은 지난 세기에 제기된 다윈(Darwin)의 진화론(進化論) 때문이며, 인민의 신앙을 통제한 전체주의 공산정권의 영향 등 다른 이유들도 포함될 것이다. 진화론은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은 학문적 또는 과학적 실체를 갖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주장에 의문을 지녔던 사람들에게 강한 지지를 받았다. 놀랄 일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교양 있는 어떤 사람에게 비논리적이며 비합리적인 창조주를 한참 묘사하고 나서 “그분을 하나님으로 믿어라”고 요구한다면, 그는 분명 거절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것이 오늘날 서방국가의 상황이다. 기독교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교리를 채택하였고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묘사하시길 그분은 셋이면서도 동시에 동등한 인격체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온 것이 곧 예수이며,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을 희생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사람의 모습을 한 하나님 즉 하나님의 화신(化身)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창조주가 죽을 수 있단 말인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인 삼위일체와 예수의 신성(神性), 예수의 성자(聖子)됨, 원죄(原罪)와 속죄(贖罪) 등은 이성적(理性的)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에도 일치되지 않는다. 이러한 교리는 예수 죽음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 원인은 이전에 있었던 우상숭배의 영향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힌두교에서도 삼자관계(삼위일체)라는 것이 있다. 브라마는 창조의 신이고, 비슈누는 보호의 신이며, 시바는 파괴의 신이다. 현대 힌두교에서는 죽은 비슈누가 부활하여, 동정녀 디바치의 아들 크리슈나(Krishna)가 되었다고 믿는다. 크리슈나는 구세주로서, 그들의 죄에 대한 희생으로 고난을 겪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뒤 다시 부활한다. 불교에서도 여러 신이 있다. 고타마(성령), 마야(동정녀)와 그녀의 아들 붓다가 있다. 붓다는 마야가 성령으로 채워짐으로써 그녀의 뱃속에서 잉태되었으며 구세주로서 죽은 후 다시 부활한다. 흥미로운 것은 12월 25일이 예수의 생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날은 힌두교의 크리슈나의 생일이고, 바벨론신의 아들 니므롯의 생일이자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빛의 신이라 불리는 미트라의 생일이다.

  여러 민족의 예언자들에게 계시된 종교는 동일한 것이었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잘못 해석되고 미신과 혼합됨으로써 신비로운 주술과 마법에 의존하는 예배, 그리고 의미 없는 의식으로 타락하였다. 그들 종교에서는, 종교의 진정한 핵심인 하나님의 개념이 다음의 다섯 가지 방법으로 격하되었다.

(1) 신을, 인간의 모습을 한, 필요와 결함이 있는 존재로 만드는 의인화(擬人化)

(2) 사람들의 인격과,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속성을 결합시킴.(예시: 힌두교와 기독교)

(3) 천사들의 신격화 (예시: 힌두교의 데바스(Devas), 조로아스터교의 야자타스(Yazatas), 기독교의 성령)

(4) 예언자의 화신(化神)(예시: 기독교의 예수, 불교의 부처, 힌두교의 크리슈나와 라마)

(5) 신성(神性)을 인격화한 뒤 특정 존재에게 신성을 부여하는 행위(예시: 기독교 삼위일체의 성부, 성자, 성령, 힌두교의 브라마, 비슈누, 시바, 조로아스터교의 아메샤 스펜타)

  주요 종교들이 신의 유일성과 본질을 왜곡함에 따라 학교에서 진화론 교육을 받는 서구 학생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 결과 중·고등학생은 물론 대학생들까지 무신론자가 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비웃기까지 한다. “그들은 어리석거나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안전하게 지켜줄 그 무엇을 필요로 하겠지!”

  필자는 최근 서구의 한 국가에서, 은퇴한 65세 이상 남녀를 대상으로 무슬림이 마련한 강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시작 부분에서 그 강사는 참석자들에게 “여러분 중에서 누가 하나님을 믿습니까?”라고 물었다. 두 사람을 빼고는 모두 손을 들었다. 강사는 다시 “누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남은 두 노인이 손을 들었다. 그 중 한사람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강사에게 반문하였다. “선생님이 말하는 하나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해주어야 우리가 대답할 수 있지 않겠소.” 행사가 끝난 뒤 나는 그 강사에게 말했다. “아까 그 사람은 지성을 갖춘 사람입니다. 처음에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 하나님은 아마도 기독교의 개념에 의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 뒤 그는 좀 더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였고 무슬림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왜 창조되었나?

  창조주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의 질문에 대해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우리가 존재하고, 죽음 뒤에는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창조되었나?”라는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 만약 우리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면 우리를 창조한 목적에 대해 말해주기를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창조주는 최후의 날에 어떠한 기준으로 우리를 심판할 것인가를 말해주지 않을까?

 이슬람의 견해는 무엇인가?

  무슬림들이 말하길, 꾸란이 있기에 우리가 왜 창조되었는가에 대해 답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저마다의 경전을 가지고 있는데 꾸란에 무슨 특별한 내용이라도 있단 말인가? 기본적으로 꾸란은 신앙, 경배행위, 도덕, 사회생활을 지배하는 법률 등 인간의 감각이나 지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책이다. 이 네 가지 이슬람의 기본 바탕은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를 필요로 하는 영역이다. 무슬림들은 꾸란이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계시한 성서라고 믿는다.

  꾸란은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23년 동안(서기 610-633년) 그분의 말을 여러 차례로 나누어 한 구절씩 또는 여러 구절씩을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에게 전달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모두 114장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장(章)을 ‘수라(surah)’라고 부른다.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는 그에게 계시되는 내용들을 즉각적이고,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하여 필사(筆寫)를 담당하는 서기들을 두고 있었다. 서기들은 양피지(羊皮紙)나 도기(陶器), 대추야자 잎이나 평평한 돌, 나무껍질과 판목(版木), 말린 동물가죽, 심지어 양이나 낙타의 어깨뼈 등을 이용하여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계시된 구절들은 사람들에 의해 암기되었는데, 단순히 꾸란을 낭송하기만 해도 그 자체가 경배의 행위로 인정된다. 무슬림들은 또한 이러한 꾸란 구절들을 재판의 준거로 삼으며 하루 다섯 번 예배마다 빠짐없이 그 구절들을 암송한다. 이 같이 꾸란의 구절들은 예언자 생존시에 잘 기록되었음은 물론 무슬림들의 마음속에서도 잘 보전되었고,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는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새로운 구절들을 어느 장에 배치할 것인가를 지시받았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각 장의 이름이 정해졌으며,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는 그의 생애 마지막 해에 가브리엘 앞에서 전체 꾸란을 1회 이상 낭송하여 최종점검을 받았다. 꾸란은 어떠한 계시록보다도 신빙성을 자랑하며, 이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꾸란의 위엄을 잘 알고 있으며 그에 걸맞게 꾸란을 소중히 다루고 있다.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 당시에 이미 많은 수의 무슬림들이 꾸란을 암송하고 있었다.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의 사후 첫 번째 칼리파(caliph)가 된 아부 바크르(Abu Bakr)는 초창기 서기들 중의 한 사람인 자이드 이븐 싸비트(Zaid ibn Thaabit)에게 계시된 꾸란의 필사 원본을 한 데 모으고 전체 꾸란을 다시 쓰게 하는 임무를 맡겼다. 자이드는 가죽을 이용하여 전체 꾸란의 필사본 한 부를 완성했는데 그 정리된 순서는 오늘날과 똑같다. 아부 바크르는 채 2년을 통치하지 못했으므로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 사후 2년 이내에 이 사본의 제작이 마무리 되었다고 본다. 이 사본은 제2대 칼리파 우마르에게 맡겨졌고, 다시 제3대 칼리프인 우쓰만에게 위탁되었다. 우쓰만 통치기간에 아랍 사람들은 중국의 제지산업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우쓰만은 자이드에게 요청하여 네 사람으로 구성된 꾸란 학자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하고 일곱 벌의 사본을 새로 제작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 사후 14년에 완성된 일곱 사본들은 무슬림 국가들의 중심지에 배분되어 각 지역 사본 제작 사업의 표준으로 삼게 했다. 그 중에서 최소한 세 개의 꾸란 원본이 오늘날 타시켄트와 이스탄불, 그리고 카이로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그 원본들이 오늘날 무슬림들이 사용하고 있는 꾸란과 한 획도 틀리지 않다는 것은 이슬람의 기적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마지막 성서인 꾸란의 진실성 그것 자체로도 기적이 되기에 충분하다. 꾸란은, 계시된 언어 그대로 글자 하나 낱말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인류가 보유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책이다. 그러한 이유로 꾸란은 유일무이하며, 이처럼 완벽한 원본 보존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것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전달된 창조주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은 예언자 모세와 다윗, 그리고 예수에게 주어진 진정한 원래의 계시서가 있었음을 믿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계시서들은 현재 모두 변질되었으며 처음 계시에 사용되었던 원본 언어 역시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꾸란은, 그 신성의 순수함을 유지한 채 유일무이하게 남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또한 꾸란은 산문도 시도 아니기 때문에 여타 인간의 저작물과는 다르다. 아랍인들은 그들의 수사법(修辭法)이 최고조로 발달했을 때 꾸란 한 장을 만들어 보려고 시도했으며, 혹은 그 비슷한 것을 만들거나 열 장 또는 책 한 권을 만들어 보려고도 시도했다. 이러한 도전은 오늘날에도 시도되지만 성공한 사람은 결코 찾아 볼 수 없다.

  초기의 학자들은 꾸란의 불가사의한 특징이 주로 그 독특한 문체(文體)와 아름다운 어법(語法)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다. 어법의 아름다움은 실로 독특하여 인간의 저작물과는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다. 초기 꾸란 주석자(註釋者)들이 수사법과 문체에 집중했던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꾸란은 창조주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것이 다루고 있는 그 어떤 영역도 독특함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꾸란에 드러난 법학(法學)을 보면 그 독특함을 느낄 수 있으며, 경배방식에 관하여 꾸란은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꾸란에서 하나님과 예언자의 지위, 그리고 도덕성의 개념들은 모두 독특하다. 만약 우리가 꾸란에서 서술한 이전 민족들의 역사를 차례로 살펴보게 되면,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으며, 이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고, 그에 따른 보상과 처벌은 어떠했는지, 기록 매체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그 당시의 일을 상세히 적고 있다. 꾸란은 이렇게 면밀히 계속되는 민족들을 단 하나의 실수도 없이 설명하고 있는데, 현대의 고고학적 발견들은 이를 잘 입증하고 있다.

 ‘꾸란’은 신뢰할 수 있는가?

  종교적인 가르침 이외에도 꾸란에서 다루고 있는 우주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은 그 수만도 수백 구절에 이른다. 꾸란은, 지구와 태양, 달과 별, 산맥과 바람, 흐르는 물, 식물과 동물 등 우주의 구성 요소와 각종 현상들, 그리고 인간의 계속되는 발전 단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주에 대한 사실과 그 현상에 관련한 꾸란 구절은 1천개가 넘는다. 꾸란이 계시된 초기에는 우주에 관한 과학적 지식이 매우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주 또는 그 현상과 관련된 구절들을 상세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때보다도 우주의 법칙들을 잘 알게 되었고 우주와 사람, 그리고 그 주변 환경에 관한 1천여개의 구절은 꾸란의 가장 명백한 기적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14세기 전에 계시된 꾸란이 그 당시 사람들이 전혀 알 수 없는 수많은 과학적 사실들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꾸란은 이러한 사실들을 묘사함에 있어 그 어떤 과학자보다도 정밀하고 정확하며 간명한 언어를 사용했다. 꾸란의 어느 구절도 과학적으로 이미 확증된 진실과 모순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이 작은 책자에서 모두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필자는 단지 다섯 구절만을 골라 꾸란의 기적을 과학적 관점으로 증명하고자 한다.

  1) 우주의 창조를 설명하기 위해 천체 물리학자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소위 ‘빅뱅(Big Bang)’ 이론을 받아들였으며, 천문학자 등 과학자들이 수 십 년간 수집한 관측 보고자료와 실험자료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빅뱅’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처음에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 즉 성운(星雲)으로 존재했다가 마침내 ‘빅뱅’이라는 두 번째 분열이 일어나 은하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 후 나뉘어져 별과 행성들, 그리고 해와 달이 되었다. 우주의 기원은 그 유례가 없는 독특한 것이며, 우연에 의해 그것이 형성했을 가능성은 제로이다. 꾸란은 우주의 기원에 관한 다음과 같은 구절의 내용을 담고 있다.

“불신자들은 하늘들과 땅이 과거에 한 덩어리였음을 알지 못하는가? 그 후 나는 그 둘을 분리하였도다. 그리고 나는 물로써 살아있는 모든 것을 만들었도다. 그럼에도 그들은 믿지 않는가?” (성꾸란 21장 30절)

  꾸란 구절과 ‘빅뱅’ 현상의 뚜렷한 일치는 너무나 확연하다. 1,400년 전 아라비아 사막에 처음 나타난 책에 이렇게 풍부한 과학적 진실이 담겨있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2) 1925년 미국의 천문학자 허블(Edwin Hubble)은 모든 은하계 별들이 서로 멀어지고 있으며, 이것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음을 의미한다면서 이에 관한 관측증거들을 제시했다. 우주의 팽창은 오늘날 이미 과학적 사실로 확립되었고, 그것은 꾸란에서 언급한 우주 형성에 관해 내용 그대로이다.

"그리고 하늘은, 내가 그것을 힘으로써 세웠으며 진실로 나는 팽창시키는 자라. " (성꾸란 51장 47절)

  호킹(Stephen Hawking)은 그의 저서 ‘시간의 역사’에서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20세기의 위대한 지적 혁명 중의 하나”라고 표현했다. 꾸란은 사람들이 망원경을 만들기도 전에 이미 우주의 팽창을 언급했던 것이다.

  3) 과학자들은 우주 속의 은하계가 형성되기 전에 있었던 천체의 물질들은 처음에는 가스 형태로 존재했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거대한 가스 물질 또는 구름들이 은하계 형성 이전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최초의 천체물질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가스(gas)’보다 ‘연기(smoke)’라는 단어가 보다 적절하다. 다음의 꾸란 구절은 ‘연기’를 뜻하는 ‘두칸(dukhān)’이라는 단어로 이러한 우주의 상태를 언급하고 있다.

 “그 후 그분께서는 연기 상태인 하늘 위로 오르셨고...” (성꾸란 41장 11절)

이러한 사실은 ‘빅뱅’의 당연한 결과이지만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 시절의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일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러한 지식의 원천은 무엇인가?

  4) 과거에는 감각이나 고통의 느낌이 오로지 두뇌에 의존한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의 여러 발견들로 확증된 사실은, 고통의 수용기(受容器)는 피부에 존재하며, 그것 없이는 사람이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화상(火傷)을 입은 환자의 등급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핀으로 콕콕 찌르는 방법이 사용된다. 만약 그 환자가 고통을 느낀다면 의사는 안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화상이 표피(表皮)만을 상하게 하는 데 그쳤고 따라서 고통 수용기가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반대로 환자가 콕콕 찌르는 고통을 전혀 느낄 수 없다면 그것은 화상이 아주 깊어 고통 수용기 역시 파괴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꾸란은 고통 수용기의 존재를 다음의 구절에서 암시하고 있다.

“진실로 나의 징표들을 부정하는 자들은, 내가 그들을 불 속에 들게 할 것이라. 그들의 피부가 다 타버릴 때마다 내가 그들에게 새로운 피부를 주었으니 그들이 고통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라.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가장 존엄하신 분이시며 가장 현명하신 분이시라. 그러나 (하나님과 예언자를)믿고 선행을 실천하는 자들, 나는 그들을 천국에 들어가도록 할 것이니 그 아래에는 강들이 흐르며 그들은 그곳에서 영원히 거주할 것이라.”

                                                 (성꾸란 4장 56-57절)

  태국 치앙마이 대학교의 해부학과장 테자센(Tagatat Tejasen) 교수는 고통 수용기 연구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였다. 처음에 그는 과학적 사실에 대한 1,400년 전 꾸란의 언급을 믿을 수 없었다. 나중에 그는 번역된 꾸란을 구하여 해당 구절을 검증하였다. 테자센 교수는 꾸란 구절의 과학적 정확성에 깊이 감동받았으며, 1985년 한 의학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신앙선언을 하고 이슬람에 귀의하였다.

  5) 철(鐵, fe)의 근원에 대해 꾸란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철을 내려 보냈으니 그 안에는 강력한 힘과 사람들을 위한 유용함이 있도다...” (성꾸란 57장 25절)

  최근에 증명된 바에 따르면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 모두는 외계(外界)로부터 철의 성분을 받아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태양의 온도로는 철을 만들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태양 표면의 온도는 섭씨 6,000도이며 중심의 온도는 약 2천만도이다. 그런데 신성(新星, novae) 또는 초신성이라는 이름의 고온(高溫)의 별은 그 온도가 무려 수십억도의 몇 백배까지 올라가는데, 바로 이 별들로부터 철이 형성된다. 이 철의 성분이 함유된 별이 폭발을 일으키고, 그 폭발의 파편들이 우주를 여행하다 다른 천체의 중력장(重力場)에 포획된다. 이것이 우리 태양계가 철을 얻게 되는 과정이며, 태양계에서 철이 만들어지지 않고 외계로부터 유입되었다는 것은 오늘날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어떻게 해서 꾸란은, 계시된 그 시절이나 그 이후 수 세기가 지나도 사람들이 알아내지 못한 이러한 사실들을 언급하고 있는가? 그것은 언젠가 사람들이 “꾸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무함마드는 그분의 마지막 예언자”라는 것을 즉각 깨닫게 될 시간이 올 것임을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꾸란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그것(꾸란)이 진리임이 명확해질 때까지 나는, 여러 곳에 있는 그리고 그들 자신 속에 있는 나의 징표들을 그들에게 보여줄 것이라. 그대의 주님과 관련하여, 그분께서 모든 것의 증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성꾸란 41장 53절)

  테자센 교수는 꾸란에 언급된 단 하나의 ‘과학적 징후’의 힘에 복속하여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어떤 사람들은 열 가지 징후를 요구할 수도 있겠고, 다른 이들은 꾸란의 신학적 원천에 대해 확신을 줄 수 있는 수백 가지의 증명을 요구할 수도 있다. 수천 가지의 징후나 증거를 보고 나서도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꼭 닫힌 심성(心性)들에 대하여 꾸란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다.

“그들은 귀머거리이며 벙어리이자 장님이니 그들은 (올바른 길로) 돌아오지 않더라.” (성꾸란 2장 18절)

“불신하는 자들의 예는 소리쳐 부르는 자를 듣지 못하는 존재(양떼)와 같나니 그것이 듣는 것은 오직 외침과 고함 뿐이라. 그들은 귀머거리이며 벙어리이자 장님이니 그들은 이성을 사용하지 않더라.” (성꾸란 2장 171절)

“그들은 꾸란을 숙고하지 않는가? 아니면 그들의 마음이 닫혀있는가?” (성꾸란 47장 24절)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 하나님은 꾸란을 통한 말씀에서 인간을 그의 대행자(Khalifah) 또는 이 땅의 관리자로 창조했다고 한다(2:30). 그러므로 인간의 기본 의무와 책임은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는 것이 된다.

“내가 진과 인간을 창조한 것은 오직 그들이 나를 경배토록 하기 위함이라.”

                                                    (성꾸란 51장 56절)

   아주 간단하다! 사람을 창조한 목적은 창조주에게 경배를 드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예언자들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하나이다.

“오, 사람들이여! 하나님을 경배하라. 그분 이외에는 그대들이 경배할 존재가 없노라.” (성꾸란 7장 59절, 7장 65절, 7장 73절, 7장 85절; 11장 50절, 11장 61절, 11장 84절; 23장 23절, 23장 32절)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삶을 만든 것은 사람을 시험하기 위해서이며, 모든 사람이 죽은 뒤 각기 그 행한 일들에 따라 보상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언급이 있다.

“그분께서는 죽음과 삶을 창조하셨으니 너희들 중에 누가 가장 훌륭한 행동을 하는지 시험하기 위함이라. 그리고 그분께서는 가장 존엄하신 분이시며 너그러이 용서하시는 분이시라.” (성꾸란 67장 2절)

  그러나 하나님을 올바로 경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분을 잘 알아야 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한 비뚤어진 개념이 형성되어 우리가 방황할 수도 있다. 꾸란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사람들에게 잘 알려주고 계신다. 예를 들면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에게 제시된 하나님에 대한 질문의 답변에 관련하여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응답하도록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에게 가르쳤다.

“말하라 : ‘그분은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모든 필요로부터 자유로우신, 완벽의 통제자이시라. 그분은 낳지도 않으셨고 낳아지지도 않으셨으며 그분과 비슷한 것은 단 하나도 없노라.’ ” (성꾸란 112장)

  이로써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가 꾸란의 저자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한데,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받아쓰라고 한 것을 공개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로부터 어떤 경배를 받기를 원하는지 꾸란에서 밝히고 있다. 또 하나님은 꾸란을 통해 우리에게 이르되, 모든 예언자들은 똑같은 메시지를 가지고 각기 그들 민족에게 왔으니 그 메시지는 곧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경배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 예언자의 처음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 꾸란의 지적이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초기의 경전들은 단순히 필기할 종이가 없거나 부족했기 때문에 잘 보전되지 못했으며, 가르침이 입을 통해 전해지는 동안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왜곡되었다. 둘째, 여러 종교의 성직자들이 당초에는 없었던 교리를 중간에 삽입하였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서기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서기 386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에야 도입되었다. 초기의 종교들이 모두 변질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를 마지막 예언자로 삼아 영원히 보전될 성서과 함께 인류의 인도자로서 그를 보낸 것이다. 하나님은 꾸란이 당신에게서 나온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의 시험 장치를 마련했다.

“그들은 꾸란을 숙고하지 않는가? 만일 그것이 하나님이 아닌 존재로부터 왔다면 그들은 그 안에서 많은 모순을 발견했을 것이라.”

(성꾸란 4장 82절)

  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오류나 모순을 발견하기 위해 꾸란을 세밀히 살피고 조사할 수가 있다. 실제로 이러한 시험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종교의 경전에도 마땅히 적용되어야 한다.

 이슬람에 ‘맹목적 믿음’이 있는가?

  이슬람은 ‘맹목적 믿음’의 종교가 아니며, 오히려 사람들에게 논리 그리고 추론과 지성을 이용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하는 종교이다. 하나님은 꾸란을 통해 사고하고, 판단하며, 자신의 생각이나 지능을 이용하는 것 등의 중요성을 사람들에게 강조했다. ‘생각’이나 ‘판단’이라는 말은 꾸란에 49회나 언급되고 있다.[1] 또한 하나님은 ‘이성을 지닌 자들’을 16회나 꾸란에서 언급하고 있으며[2], 제20장에서 ‘지성을 지닌 자들’이라는 용어를 2회 사용하고 있다[3].

  꾸란의 여러 장에서 ‘마음(al-fuād)’과 ‘가슴(al-qalb)’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이 둘은 같은 의미로 쓰인다. 꾸란의 수십 구절에서는 또한 ‘명상과 사고(fikr 또는 tafakkur)’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기억 또는 상기(想起, tadhakkur)’이라는 용어를 수십 구절에 등장시켜 그 중요함을 강조하고 주의를 촉구한다. 사고한다는 것은 새로운 지식을 늘리거나 얻기 위해서이며, 기억한다는 것은 잘 잊기 쉬운 관련 지식들과 사건들을 상기하고 스스로 생각해내기 위해서이며 이것은 특히 신앙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칭찬하고 계신다.

“진실로 하늘들과 땅의 창조와 낮과 밤의 교체에는 이성을 지닌 자들을 위한 징표들이 있노라. 그들은 서서, 앉아서, 그리고 누워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늘들과 땅의 창조를 숙고하더라. ‘우리의 주님! 당신께서는 아무 목적 없이 이것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 찬미를 드립니다! 그러니 불(지옥)의 고통으로부터 저희를 보호하여 주십시오.’ ” (성꾸란 3장 190-191절)

 꾸란에 대하여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그대에게 내린, 축복 가득한 책. 그들이 그것의 징표들을 숙고하고 이성을 지닌 자들이 깊이 생각하기 위함이라.” (성꾸란 38장 29절)

  꾸란에서 ‘알다(know)’ 또는 ‘지식(knowledge)’이라는 말의 어근 ‘일름(ʻilm)’에서 형성된 낱말은 865회나 발견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아는 자들과 모르는 자들이 같을 수 있느뇨?...” (성꾸란 39장 9절)

“그리고 지식을 부여 받은 자들이 그것(꾸란)이 그대 주님으로부터 온 진리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 그리하여 그들은 그것을 믿고 그들의 마음이 그것에 순종하더라. 그리고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올곧은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라.” (성꾸란 22장 54절)

  한편 꾸란은 신화(神話)나 환영(幻影), 어리석음과 무지, 맹목적인 모방, 억측과 편견, 변덕과 욕망 등의 심성(心性)을 완강히 거부한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꾸란에서, 이 땅 위의 대다수 사람들이 방황하는 것은 억측과 추측, 그리고 무지를 따랐기 때문이라고 확증하고 계신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지상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따른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길로부터 그대를 방황시킬 것이라. 그들은 단지 억측만을 따를 뿐이며 그들은 오직 거짓만을 말하더라.” (성꾸란 6장 116절)

  죽음 이후의 삶이 존재하는가?

  하나님의 모든 예언자들은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죽은 뒤의 삶을 믿을 것을 당부했다. 예언자들은 죽음 뒤의 삶에 대한 믿음을 매우 강조했으며, 사후세계를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며 다른 모든 믿음을 의미 없게 만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나님의 모든 예언자들이 죽음 뒤의 삶이라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변함없이(몇 천 년의 간격을 뛰어넘어) 다루었다는 이 사실은 사후세계에 대해 그들이 선포한 지식의 원천이 똑같이 하나님의 계시에서 비롯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그 당시 사람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쳤으며, 사람들은 특히 죽은 후의 삶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들은 성실한 추종자들을 많이 확보하였다.

  여기서 의문이 제기된다. 무엇이 그 추종자들로 하여금 조상들이 세운 신앙과 전통, 그리고 관습들을 포기하게 하였는가? 그들 자신의 공동체에서 철저하게 소외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대답은 명료하다. 그들은 마음과 가슴의 능력을 활용하여 진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들은 지각적 의식을 통하여 진실을 깨달았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죽은 뒤의 삶에 대한 지각적 경험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각적 의식 이외에 인간에게 이성적(理性的), 미적(美的), 그리고 도덕적 의식을 동시에 부여했다. 바로 이 의식이 감각적 자료로는 검증이 될 수 없는 진실과 관련하여 인간을 올바로 인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한편으로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사후세계를 믿으라고 촉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미적, 도덕적, 이성적 의식에 호소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꾸란은 불신자들이 사후세계를 부인하는 확실한 근거를 갖지 못하고 있음을 아주 명료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은 순전히 억측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길 ‘현세에서의 우리 삶 말고는 어떤 것도 없다. 우리는 죽고 또 살며 우리가 죽는 이유는 오직 시간의 흐름일 뿐이다.’ 그것에 관해 그들에게는 어떠한 지식도 없노라. 그들은 오직 추측만을 할 뿐이라. 그들에게 나의 명백한 말씀이 낭송될 때 그들의 주장은 오직 ‘너희들의 말이 옳다면 우리의 조상을 데려와 보라’라고 말하는 것뿐이더라. 말하라.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을 살리시고 죽음에 이르게 하시며 그 후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부활의 날로 너희를 모이도록 하시니라.’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더라.” (성꾸란 45장 24-26절)

  죽음 이후의 삶의 필연성에 관해 꾸란이 제시하는 여러 설명은 인간이 도덕적 의식을 갖추기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실제로 만약 죽음 이후의 삶이 없다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 자체가 의미 없게 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더라도 그가 믿는 존재는 불공정하고 인간을 배려하지 않는 신(神)으로서, 예전에 한번 인간을 창조하기는 했으나 지금은 그들의 운명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 그런 신이 될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은 공정하시다. 무고한 수백, 수천의 백성들을 고문하고 살해하며, 극심한 사회 부패를 조장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 그들의 욕망 충족의 도구로 삼는 등 셀 수 없이 많은 죄를 저지른 압제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엄하게 처벌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인간 수명이란 매우 짧기 때문에, 또한 한 사람의 행위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적절한 처벌과 보상은 불가능하다.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과 사악하고 나쁜 사람을 똑같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도덕적이고 미적이며 이성적인 능력을 갖춘 인간이라면 이러한 논리를 거부하고 사후 세계의 가능성을 시인할 것이다. 하나님은 꾸란에서 이러한 진리를 확인하고 있다.

“내가 너희들을 장난으로 창조하였다고 생각했던가? 그리고 너희들이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가?” (성꾸란 23장 115절)

“그리고 나는 하늘과 땅과 그 둘 사이에 있는 것을 아무 목적 없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불신하는 자들의 억측이라. 그러하니 불신하는 자들에게는 불(지옥)의 재앙이 있도다. (하나님과 예언자를) 믿고 선행을 실천하는 자들과 대지에 해악을 퍼뜨리는 자들을 내가 동일하게 대우한단 말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과 사악한 자들을 내가 동일하게 대우한단 말인가?” (성꾸란 38장 27-28절)

“악을 행한 자들은 내가 그들을, 그들의 삶과 그들의 죽음에 있어서, (하나님과 예언자를) 믿고 선행을 실천한 사람들과 동일하게 대우할 것이라 생각했단 말인가? 그들의 판단이 참으로 악하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진리로써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으며 그리하여 모든 영혼이 그가 얻은 것으로 보상을 받게 하고자 함이라. 그리고 그들은 부당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리라.”

                                                (성꾸란 45장 21-22절)

“그리고 나는 하늘들과 땅과 그 둘 사이에 있는 것을 장난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나는 그 둘을 오직 진리로써 창조하였으나 그들 대다수는 알지 못하더라. 진실로 구분의 날(심판의 날)은 그들 모두에게 시간이 정해진 날이라.”

                                                (성꾸란 44장 38-40절)

꾸란은 심판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각자의 행위에 따라 영혼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고 강조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불신하는 자들이 말하길 ‘우리에게 심판의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말하라 : ‘그렇지 않노라. 나의 주님, 보이지 않는 것도 아시는 그분께 맹세코 그것은 너희들에게 다가갈 것이라. 하늘들과 땅에 있는 티끌만한 무게의 것도, 그보다 더 작은 것도, 그보다 더 큰 것도 그분을 피해갈 수 없노라. 그 모든 것들은 명백한 책에 기록되어 있노라. (하나님과 예언자를)믿고 선행을 실천하는 자들을 보상하기 위해서라. 그러한 자들, 그들에게는 용서와 풍성한 양식이 있노라. 그러나 사람들이 나의 징표들을 멀리 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 그러한 자들, 그들에게는 가혹하고도 고통스런 벌이 있노라.” (성꾸란 34장 3-5절)

부활의 날에는 하나님의 속성인 공정과 자비가 완벽하게 나타나게 된다. 천국의 기쁨이 그들을 맞이할 것이라 믿고 현세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고통을 감내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축복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다가올 사후세계를 돌보지 않는 사람들은 가장 비참한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그 둘을 비교하여 꾸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와 곧 이행될 아름다운 약속을 맺은 자와, 내가 현세 삶의 향락을 맛보게 한 후 심판의 날 (지옥으로) 불러들일 자가 같단 말인가?” (성꾸란 28장 61절)

  사후세계를 믿는다는 것은 저 세상에서의 성공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각자의 행위를 책임감 있고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되어  평화와 행복이 충만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모든 영혼은 죽음을 맛보노라. 그리고 나는 나쁜 것과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시험하며 너희들은 나에게로 돌아오게 되노라.” (성꾸란 21장 35절)

 왜 ‘꾸란’을 읽어야 하는가?

  꾸란은 인간생활을 규제하고 다스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계시한 기본적 질서이기 때문에 누구도 이를 소홀히 할 수 없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내용이 창조주의 완벽한 지식으로 언급되어 있다. 꾸란은 진리를 널리 밝히면서 사람들을 진리의 길로 초대하고 있는데, 인간의 운명과 각 개인의 숙명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꾸란은 사람들을 교육시켜 그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하도록 만듦으로써 인간을 가장 높은 도덕적, 지적, 사회적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더군다나 꾸란은 하나님 말씀 그대로이며, 창조된 것이 아니다. 꾸란은 인간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에게 계시되었다. 그것은 마지막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에게 부여된 불멸의 기적으로 그의 예언자 직분에 대한 증명이며, 이후 세대를 위한 증거이기도 하다. 꾸란은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14세기 전에 계시된 이후 오늘날까지 원형 그대로의 아랍어 형식이 완벽한 형태로 그대로 보전되고 있다.

  독자가 꾸란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면 무엇을 얻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 네 가지 중요한 범주로 구분할 수 있다.

  1) 하나님께서 스스로 묘사한, 실제 그대로의 창조주를 알 수 있음.

  2) 이 세상에서 삶의 목적과 각자가 살아가는 동안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음.

  3) 각자의 태도와 행동의 결과에 대해 의식하게 됨.

  4) 모든 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음. 하나님에게는 경배와 복종을, 이웃 사람 모두에게는 공정함을 실천해야 하며, 사물을 사용할 때는 좋은 목적으로 써야 함.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것은 인간과 창조주의 관계를 확증하고 새롭게 하며, 유일하고 진정한 경배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진정하고도 정확한 숭배행위를 회복함에 있다.

“...그러니 그들이 나의 부름에 응하도록 하고 나를 믿도록 하라. 그들이 올바른 길로 인도될 것이라.” (성꾸란 2장 186절)

  왜 이슬람인가?

  이슬람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며 또한 특이한 종교도 아니다. 본질에 있어 이슬람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여러 단계에서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 인류에게 전한 바로 그 종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의 조악한 혼합행위와 신학과 철학 등이 개입되어 이전의 종교는 변질되고 말았다.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가 최후의 예언자 및 하나님의 사도로 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임무는 인간 삶에 있어서의 난제와 혼란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이 만들어낸 철학과 신학에서 비롯된 왜곡된 믿음을 바로잡았다. 그는 우리의 창조주에 대한 순수한 일신론(一神論) 신앙을 복원하였으며, 하나님에 대한 가장 완벽하고 숭고한 깨달음을 가져다 주었다.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믿으며, 그분이 바라는 방식으로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다. 이는 그의 명령에 따라 우리의 삶을 영위하는 것도 포함된다. 예언자 무함마드(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기를) 이전의 예언자들이 전한 계시는 현재 모두 왜곡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지막 최종적 계시(이슬람)를 따르지 않고서는 계시의 목적이 올바르게 성취될 수 없다고 하나님께서는 꾸란을 통해 밝히고 있다. 하나님은 심판의 날에 오로지 마지막 예언자가 전하는 계시에 따라, 이슬람을 믿고 따랐는가를 기준으로 사람들을 판결할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의 종교는 이슬람이라...” (성꾸란 3장 19절)

“이슬람 이외의 것을 종교로 삼길 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내세에서 손실자 중의 한 명이 될 것이라.” (성꾸란 3장 85절)

  무슬림들은 현세의 삶이 다음 세상을 위해 준비된 시험이라고 믿는다. 무슬림들은 인간이 단순히 속세의 삶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 세상이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만약 어리석은 자가 ‘먹기 위해서’ 살고, 지혜로운 사람이 ‘살기 위해서’ 먹는다면, 더 지혜로운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사는 것이다.

  어떻게 무슬림이 되는가?

  어떤 사람이 이슬람에 입교하여 무슬림이 되기 위해서는 순수한 확신을 가지고 ‘신앙 증언(Shahaadah)’을 하면 된다. “아슈하두 알라- 일라-하 일랄라, 와 아슈하두 안나 무함마단 라수-룰라.” 위와 같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이슬람에 귀의하게 되는데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나는 하나님 이외에 경배 받을 존재가 없음을 증언하며,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사도임을 증언합니다.”

* 이슬람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하시는 분은

1. www.koreaislam.org (한글)

2. www.quran.or.kr (한글)

3. www.islamhouse.com (한글)

4. www.discoverislam.com (영어)

5. www.islam-guide.com (영어)

6. www.sultan.org (영어)



[1] 아랍어로 ‘타으낄룬’은 24번, ‘야으낄룬’은 22번, ‘아으깔’과 ‘나으낄’, ‘야으낄’은 각각 한번씩 언급된다.

[2] 아랍어로 ‘울룰 알밥’ 또는 ‘울릴 알밥’

[3] 꾸란 제 20장에서 쓰인 아랍어 ‘울린-누하’